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수경 방북 사건 (문단 편집) === [[북한]] === '''"남한의 체제 경쟁 승리를 북한이 생중계로 알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정부 당국에도 '''"(임수경이) 뜻밖의 공로를 세운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당시 북한 사회가 이 사건으로 받은 충격은 상당했눈데 임수경 자체가 당시의 북한 젊은 층에게 엄청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북한에서 임수경은 '자유'를 상징하게 되었다. 방북 후 북한 대학생 사이에서는 원래는 금지된 [[미국]]의 상징인 임수경과 같은 면티에 청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이 일명 '''림수경 복장'''으로 유행했으며 <[[전대협]] 진군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북한 전역에서 유행했다. 북한은 중산층 자제인 임수경을 통해서 남한이 어떤 사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다. 즉 임수경의 여유롭고 자유분방한 행동과 경제적 여유를 통해 남한의 경제적 수준과 남한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북한에서 사상 투쟁(사상 통제를 겸한 사실상의 재[[세뇌]])을 하느라고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임수경의 가족들도 뜻하지 않게 북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을 때 임수경과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걸 믿지 못한 북한 기자방문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을 방문했는데 '통일 열사의 가족이 고초를 당하는지 확인하고, 만약 사실이면 비판을 하겠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임수경이 살던 자택에 가 보니 식솔들은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임수경 가족의 생활상까지 북한 TV로 방영(사실상 생중계)되었다. 북한에서 사는 사람이 [[탈북|무단으로 남한에 갔다가]] 되돌아오면 본인은 사형수가 되고 식구를 포함한 일가친척은 [[연좌제]]가 적용되어 3대가 [[정치범수용소/북한|정치범수용소]]로 들어가기 때문에 임수경의 가족들이 멀쩡히[* 위에서 서술되어 있듯 온갖 [[언론플레이]]로 직장도 짤리고 힘든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은 맞았다. 오죽하면 이 기습 취재마저 임수경 가족 측이 북한과 내통한 것이 아니냐고 안기부에서 조사를 벌인 것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655|주류 언론에서 떠들었을 정도]]였겠나?]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북한에게는 대경실색할 일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인민혁명당 사건]],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 정치적인 사건의 피해자들의 유족들이 주기적인 감시와 막대한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던 사례는 있긴 했으나 적어도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반체제 인사, 그것도 (누명을 쓰고) '''처형된''' 반체제 인사의 가족들을 가족만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만이라는 이유만으로'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당대 남한에서도 일가족이 간첩단 활동을 했다고 조작하는 사건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모조리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그런 정치범의 집안이 우선 수도인 서울에서 쫓겨나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단 사실에 북한 사람들은 경악했고[* 참고로 평양은 [[기본 군중]] 등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사람만 살 수 있는 곳이며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낮다고 판단되면 평양에서 쫓겨난다. 사실 박정희, 전두환 시기에도 독재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서울]]에서 비교적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며 심지어 어느 면에서는 '''북한도 능가하는(!)''' 21세기 최악의 독재 국가인 [[에리트레아]]에서도 2017년에 수도 [[아스마라]]에서 공개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는 것을(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에리트레아에서도 반정부 인사가 수도에 사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감안하면 체제에 충성하는 사람만 수도에 살 수 있는 북한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국가인지인지 알 수 있다.] 임수경의 아버지가 지하철 공사 간부라는 사실에 또 경악했으며 기자들이 남조선 당국의 탄압과 감시를 뚫고 갔다고 강조해 놨는데 임수경의 집에서 컬러 [[텔레비전]][* 북한의 농촌에서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컬러 TV가 상당히 귀했다고 한다. 물론 도시에서는 컬러 TV가 어느 정도 보급된 상황이었다.], [[소파(의자)|소파]],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이 있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통조림]]이나 [[우유]]가 우수수 쏟아져나와서 북한 주민들은 그만 눈이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서 잘사는 집의 기준은 소위 '[[5장 6기]]'였다. [[https://blog.naver.com/ipre17/50011352179|링크]]에서도 언급되지만 5장은 "[[https://ko.dict.naver.com/#/entry/koko/6e0dbf93b40942bd97bcb36590af62f8|이불장]], [[옷장|양복장]], [[책상|책장]], [[식탁|식장]],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16249&cid=51399&categoryId=51399|신발장]]"을 말하며 6기는 "[[텔레비전|수상기]], [[냉장고|랭동기]], [[세탁기]], [[재봉틀|재봉기]], [[선풍기]][* 현재는 남한 기준으로 선풍기가 아직도 잘만 쓰이긴 하지만 선풍기보다는 [[에어컨]]이 대세다.], [[녹음기|록음기]]"를 말한다. 거기에 임수경의 어머니는 기자들을 환대하면서 늘 먹던 대로 차렸다면서 밥상을 차려 대접했는데 쌀밥에 반찬도 많이 나왔다. 북한애는 옛날이나 요즘이나 [[평양시|평양]]에서도 저것들을 모두 갖춘 집은 극소수일 가능성이 높다. 당장 [[고난의 행군]] 당시 경제가 쇠퇴했다는 것을 감안하고 이후에도 80년대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한 걸 보면 평양 바깥에서는 오히려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남한에서 저것들은 1990년 당시에도 중산층이나 중산층 아니더라도 재봉틀만 제외하면 어지간해서는 다 있었다. 당장 단칸셋방에 살아도 90년대라면 웬만하면 다들 갖고 있었던 물건들이다. 재봉틀은 두지 않는 집이 많았지만 이것은 남한이 북한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옷 가게만 가면 입맛대로 옷을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남한의 경제 발전의 영향으로 이미 1980년대부터 패션 산업이 발달하고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의류 공급이 늘어난지라 (지금도 그렇지만) 재봉틀로 만들어 입는 것보다 가게에서 사서 입는 게 더 저렴했다. 물론 위에 설명했듯이 임수경은 남한에서도 제법 형편이 넉넉한 중산층 이상의 집안 출신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안면몰수하고 임수경과 그 가족들을 [[부르주아]]라고 폄하하며 '저건 남조선의 거짓 선전일 뿐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과적으로 '''체제 경쟁에서 졌다는 걸 TV 생중계를 통해 보여주면서''' 통렬하게 인정하고 만 꼴이 되고 말았다. [[임수경]]이 재판을 받을 때도 북한은 충격을 받았다. 북한은 [[로동신문]]으로 "임수경이 구형 15년에,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고 소개하며 한국 정부를 비판하긴 했지만 사실 이것도 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__제대로 된 재판__을 열고 사형이나 무기징역도 아닌 __징역 15년을 구형__받고 최종적으로 __징역 5년__'''이 선고되었다는 사실도 북한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선고 형량의 70%인 3년 반만에 나왔다'''는 사실까지 북한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동안 북한 정부로부터 이른바 ''''악랄한 미제의 파쑈 괴뢰 도당''''이라는 가르침만 받으면서 남한을 북한 이상으로 잔혹하고 무자비한 곳으로 알고 살아 왔던 북한 주민들에게 반역자를 엄벌하기는커녕 고작(?) 15년형을 선고하고는 이도 너무한 것처럼 보여서 형량을 깎아주고 깎아주 다가 아예 [[가석방]]까지 시켜준 남한 정권의 상상도 못한 상냥함(?)에 더 충격이 컸다. 거기다 그 기간에 (북한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불가능한) [[감옥]]에서 [[편지]]와 [[일기]]를 쓰고 책도 읽는다는 식으로 나오니까 북한으로서는 진짜 뒤집어질 일이었다. 물론 아래에 나오듯이 공식 처벌 외에도 임수경과 그 가족들이 겪은 유무형의 탄압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조차도 북한의 현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실제로 [[북한이탈주민]]인 도명학 작가는 '''[[https://youtu.be/2Tpwd4scFVI?t=4012|"아니, 남조선에서는 어떻게 정치범이 감옥에서 글을 쓸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 못 가서 석방도 되었다고? 그럼 지금 남조선이 우리보다 훨씬 자유로운 세상이 아닌가?"]]''' 라면서 자유로운 대한민국 사회를 바라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한국의 발전상을 서울 올림픽이 방영되는 중국 방송을 몰래 TV로 보고 너무 놀라서 '''[[https://youtu.be/2Tpwd4scFVI?t=3913|"내가 북한 사회에 속았다!"]]''' 라는 생각에 [[탈북]]했다고 한다. 사실 북한 사람들은 임수경이 [[군사분계선|휴전선]]을 넘어 돌아갈 때 죽으려고 돌아가는 줄 알고 슬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 기준으로 사실상 용서해 준 거나 다름없는 이 행위에 그동안 자신들이 알던 남한에 대한 이미지가 왕창 무너지면서 충격은 훨씬 커졌다. 더구나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89년]], 즉 민주화 2년 후인 데다[* 이때는 [[6.29 선언]]이 있은 지 고작 2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 한국은 이전보다 경제가 성장하긴 했어도 아직 미흡한 게 많은 [[중진국]]었다.[* 한국이 실질적으로 선진국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한 2000년대 초반이며 대외적으로 선진국 이미지가 확립된 것은 2000년대 후반이다. 자세한 것은 [[선진국/대한민국]] 항목 참조.] 그런 시절에 북한 사람들은 임수경의 모든 것을 보고 '''잘 살고 자유로운 한국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탈북자 출신 가수인 [[김용(1960)|김용]]도 '머리를 빠는 남자'라는 책에 이 일을 회고하며 충격이었다고 서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